금빛 자전거 윌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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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01-29 06:26조회2,69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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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자유를 상징하는 금빛 자전거 윌리어 TRIESTINA
유럽의 자전거 메이커 중에는 100년 이상의 오랜 전통을 가진 곳들이 있다. 자전거의 역사에 관심이 많다면 오랜 역사를 가진 브랜드의 이름과 엠블럼의 유래, 그 자전거를 탔던 명선수들에 대한 재미난 이야기들을 찾아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예를 들면 106년의 역사를 가진 윌리어 같은 브랜드 말이다
윌리어의 아이덴티티로 자리잡은 오렌지빛 프레임
이탈리아의 자전거 브랜드 중에는 피나렐로나 비앙키, 데로자 처럼 창립자의 이름을 브랜드명으로 한 곳들이 많다. 아마 독자 여러분 중에는 윌리어(Wilier)라는 이름도 브랜드 창립자의 이름이 아닐까 생각한 분이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러나 윌리어는 사람의 이름이 아닌 ‘이탈리아 만세! 자유와 구원을(Viva l'Italia leberata e redenta)’이라는 구호를 짧게 줄인 것이다. 만세를 뜻하는 이탈리아어 ’Viva'를 짧게 줄여 ‘VV’라 쓴 것이 윌리어라는 이름의 첫 글자가 되었다.
윌리어 트리에스티나, 107년의 역사
윌리어 트리에스티나(Willier Triestina)는 1906년에 창립된 자전거 메이커로, 107년의 오랜 전통을 자랑한다. 창립 당시의 이름은 윌리어였으며, 창립자 달 몰린(Dal Molin)이 베니스에서 10㎞ 정도 떨어진 몬테그라파에 자전거 공장을 세우면서 107년 역사의 첫 걸음을 내딛었다.
윌리어 창립 당시 이탈리아는 수많은 내전 끝에 통일 왕국이 된지 50년이 채 안 된 약소국이었다. 윌리어라는 이름에는 이탈리아인의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담겨있다.
1915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비극이었지만, 한편으로 윌리어가 크게 성장하는 계기가 된다. 당시 말과 자전거는 지금의 자동차와 모터사이클에 비견될 만큼 산업적, 군사적으로 중요한 운송수단이었고, 윌리어는 전쟁기간 동안 자전거를 대량생산하면서 회사의 규모를 크게 키우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뚜르 드 프랑스나 지로 디 이탈리아 같은 자전거 레이스는 모두 중단되었다. 윌리어 또한 이 기간 동안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세계대전으로 인한 윌리어의 피해는 크지 않았고, 윌리어는 금방 과거의 명성을 회복했다. 1940년대 후반, 윌리어의 직원 수는 300명이 넘었고 하루 200대 이상의 자전거를 생산했다.
사이클링 팀 ‘윌리어 트리에스티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윌리어는 프로사이클링 팀을 창단하게 된다. 당시 이탈리아의 로드레이스는 이탈리아 최고의 선수라 불리었던 베테랑 지노 바탈리와 젊은 라이벌 파우스토 코피의 치열한 경쟁으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트리에스테에서 열린 윌리어의 승리를 축하하는 퍼레이드
윌리어의 창립자 달 몰린은 당시 지노 바탈리, 파우스토 코피와 경쟁하던 지로 디 이탈리아 3회 우승의 베테랑 선수 지오르다노 코투르를 후원하기로 결정한다. 윌리어는 아드리아 해 연안의 도시 트리에스테에서 지오르다노 코투르를 리더로 한 프로사이클링 팀을 출범시키는데, 이 팀이 바로 ‘윌리어 트리에스티나(Wilier Triestina)’이다.
윌리어 트리에스티나라는 이름은 당연히 팀이 출범한 도시의 이름인 트리에스테에서 가져온 것이다. 당시 트리에스테는 이탈리아와 공산주의 국가인 슬로베니아가 반씩 차지하고 있었고, 시민들은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으로 대립하고 있었다. 시민들끼리 서로를 미워하고 대립하는 분위기 속에 긴장감은 점점 높아졌고, 유혈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윌리어 트리에스티나 팀은 스포츠를 통해 시민들을 하나로 묶었다. 윌리어는 그야말로 이탈리아인의 애국심을 상징하는 아이콘이었다. 1945년 윌리어는 회사명 또한 윌리어 트리에스티나로 바꾸게 된다.
윌리어 트리에스티나 팀은 1947년 촉망받던 젊은 사이클리스트 피오렌조 마니(Fiorenzo Magni)를 영입한다. 마니는 이듬해인 1948년 지로 디 이탈리아에서 코피, 바탈리 등과 치열한 경쟁 끝에 결국 우승의 유니폼인 마리아 로자를 입으며 윌리어 트리에스티나의 이름을 널리 알린다. 마니는 1950년까지 윌리어 트리에스티나 팀에서 활약했으며, 지로 이외에도 투어 오브 플랜더스에서 2회의 우승을 차지했다.
1948년 지로 디 이탈리아에서 코피, 바탈리와 치열한 경쟁 끝에 마리아 로자를 입으며 윌리어 트리에스티나의 이름을 널리 알린 피오렌조 마니
당시 윌리어 트리에스티나는 프레임 전체를 구리로 도금하는 독특한 오렌지 빛 프레임을 생산했다. 이 태양처럼 붉게 빛나는 프레임은 ‘라마타(ramata)'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곧 윌리어 트리에스티나의 상징으로 자리 잡게 된다.
그러나 영광의 날은 길지 않았다. 1950년대 이후 이탈리아는 빠르게 ‘스쿠터’와 ‘코터사이클’로 상징되는 공업화의 길을 걷는다. ‘기적의 경제 부흥’이 찾아왔지만 반면 사이클링의 인기는 점점 식어갔고, 결국 윌리어 트리에스티나는 1952년을 마지막으로 팀을 해산하게 된다.
프로 레이스로의 복귀
하지만 1980년대, ‘사이클링의 황금시대’를 맞이하며 윌리어 트리에스티나는 다시 레이스로 복귀한다. 메캅-훈베드, 셀레 산 마르코, 마레노, 슈퍼메르카티 브리안졸리 팀 등이 윌리어를 탔다. 1985년과 1986년에는 클라우디오 코르티가 윌리어의 부활을 알리는 구리빛 ‘라마타’ 프레임의 로드바이크를 타고 이탈리아 내셔널 챔피언십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2012년 선보인 타임트라이얼 바이크 트윈포일. 이름 그대로 에어로 형상의 양쪽 포크 레그가 위로 연결되어 전용 스템과 일체화되어 공기저항 감소를 효과를 낸다
1990년대 초반 윌리어 트리에스티나는 잠시 레이스를 떠났지만 1995년 브레스치알랏 팀을 통해 복귀하여 지로 디 토스카나 우승, 지로 디 이탈리아 15스테이지 우승을 차지하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1997년은 특히 기념비적인 해였다. 선수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의 부상과 장애를 극복하고 돌아온 마르코 판타니를 중심으로 한 신생팀 메르카토네-우노는 윌리어 트리에스티나를 타고 레이스에 데뷔했다.
마르코 판타니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슈퍼 클라이머로 잘 알려졌지만, 자전거에 대해서도 까다롭기로도 유명했다. 판타니는 끊임없이 더 딱딱하면서도 가벼운 자전거를 만들어 줄 것을 요구했고, 이를 개발하는 것은 윌리어 트리에스티나의 몫이었다. 마르코 판타니는 1997년 뚜르 드 프랑스에서 종합 순위 3위에 올랐다. 사고 후유증으로 한쪽 다리가 3㎝나 짧아진 장애를 극복하고 거둔 성과였다. 하지만 단순한 3위가 아니었다. 이는 가장 험준한 알프스 스테이지에서 우승을 거둔, 톱 클라이머의 복귀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997년 뚜르 드 프랑스 알프스 스테이지에서 우승과 함께 부활한 마르코 판티니와 까다롭기로 소문난 그의 자전거들
뚜르 드 프랑스의 산악 스테이지에서 가장 험준한 스테이지가 바로 랄프 듀에즈라는 점은 이견의 여지가 없다. 평균 경사도 7.9%, 고도차 1860m, 힐클라임 구간 22㎞의 악몽 같은 산악 코스다. 그리고 이 랄프 듀에즈 힐클라임의 최고기록은 1997년 마르코 판타니가 세운 37분 35초로, 아직도 이 기록을 깰 선수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마르코 판타니=비앙키라고 기억한다. 마르코 판타니가 뚜르와 지로 동시제패를 이룬 1998년 비앙키를 탔던 것은 맞다. 그러나 클라이머로서 전설적인 기록을 세운 1997년, 랄프 듀에즈에서 마르코 판타니가 탔던 자전거는 다름 아닌 윌리어 트리에스티나였다. 윌리어 트리에스티나는 당시의 기술로서는 한계에 가까운 경량화를 이룬 최신형 레이싱바이크인 ‘랄프 듀에즈’와 ‘모티롤로’였고 이는 마르코 판타니의 산악 스테이지 우승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윌리어 본사와 공장 내부에 전시된 윌리어의 영웅들
2002년 윌리어 트리에스티나는 다시 메르카토네-우노 팀과 함께한다. 비록 이때의 마르코 판타니는 예전과 같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지만, 그를 위한 첨단 레이스바이크 개발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윌리어 트리에스티나는 세계 최초로 비대칭형 프레임을 레이스에 투입한 자전거 메이커이기도 하며, 이러한 최신 레이스바이크 개발에 대한 의지와 노력은 람프레와 게롤슈타이너, 코피디스를 비롯한 여러 팀, 발란과 쿠네고, 페타키를 비롯한 유명선수들을 통해 값진 승리로 보답 받았다.
세계챔피언 발란의 저지와 그의 자전거
이탈리아의 많은 자전거 메이커가 점차 신기술 개발 경쟁력의 부족으로 과거의 명성을 잃어가는 가운데, 윌리어 트리에스티나는 계속 성장을 이어나가고 있는 몇 안 되는 전통 있는 자전거 메이커 중 하나다. 윌리어 트리에스티나는 현재 이탈리아에서 피나렐로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이 판매되며, 3위인 콜나고와는 큰 격차를 벌리고 있다. 윌리어 트리에스티나는 지금도 BB360EVO와 같은 새로운 규격을 선보이며, 레이스를 통해 검증된 프레임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107년이라는 오랜 전통은 끊임없는 혁신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올 수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다.
윌리어 제품, 어디서 만나볼 수 있을까?
윌리어는 국내에서 메리다와 산타크루즈, 아이비스의 국내 유통을 담당하는 오디바이크에서 만나볼 수 있다. 센토 1SR, 센토 1 에어, GTR, 트리에스티나 등 다양한 로드바이크가 출시되어 있으며 철저한 A/S도 받을 수 있어 점차 인기를 높여가고 있다.
제품문의 : ㈜오디바이크 02-2045-7100 www.odbike.co.kr
글 장낙규 객원기자
제공 자전거생활
출처 바이크조선
발행 2014년 3월
유럽의 자전거 메이커 중에는 100년 이상의 오랜 전통을 가진 곳들이 있다. 자전거의 역사에 관심이 많다면 오랜 역사를 가진 브랜드의 이름과 엠블럼의 유래, 그 자전거를 탔던 명선수들에 대한 재미난 이야기들을 찾아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예를 들면 106년의 역사를 가진 윌리어 같은 브랜드 말이다
윌리어의 아이덴티티로 자리잡은 오렌지빛 프레임
이탈리아의 자전거 브랜드 중에는 피나렐로나 비앙키, 데로자 처럼 창립자의 이름을 브랜드명으로 한 곳들이 많다. 아마 독자 여러분 중에는 윌리어(Wilier)라는 이름도 브랜드 창립자의 이름이 아닐까 생각한 분이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러나 윌리어는 사람의 이름이 아닌 ‘이탈리아 만세! 자유와 구원을(Viva l'Italia leberata e redenta)’이라는 구호를 짧게 줄인 것이다. 만세를 뜻하는 이탈리아어 ’Viva'를 짧게 줄여 ‘VV’라 쓴 것이 윌리어라는 이름의 첫 글자가 되었다.
윌리어 트리에스티나, 107년의 역사
윌리어 트리에스티나(Willier Triestina)는 1906년에 창립된 자전거 메이커로, 107년의 오랜 전통을 자랑한다. 창립 당시의 이름은 윌리어였으며, 창립자 달 몰린(Dal Molin)이 베니스에서 10㎞ 정도 떨어진 몬테그라파에 자전거 공장을 세우면서 107년 역사의 첫 걸음을 내딛었다.
윌리어 창립 당시 이탈리아는 수많은 내전 끝에 통일 왕국이 된지 50년이 채 안 된 약소국이었다. 윌리어라는 이름에는 이탈리아인의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담겨있다.
1915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비극이었지만, 한편으로 윌리어가 크게 성장하는 계기가 된다. 당시 말과 자전거는 지금의 자동차와 모터사이클에 비견될 만큼 산업적, 군사적으로 중요한 운송수단이었고, 윌리어는 전쟁기간 동안 자전거를 대량생산하면서 회사의 규모를 크게 키우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뚜르 드 프랑스나 지로 디 이탈리아 같은 자전거 레이스는 모두 중단되었다. 윌리어 또한 이 기간 동안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세계대전으로 인한 윌리어의 피해는 크지 않았고, 윌리어는 금방 과거의 명성을 회복했다. 1940년대 후반, 윌리어의 직원 수는 300명이 넘었고 하루 200대 이상의 자전거를 생산했다.
사이클링 팀 ‘윌리어 트리에스티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윌리어는 프로사이클링 팀을 창단하게 된다. 당시 이탈리아의 로드레이스는 이탈리아 최고의 선수라 불리었던 베테랑 지노 바탈리와 젊은 라이벌 파우스토 코피의 치열한 경쟁으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트리에스테에서 열린 윌리어의 승리를 축하하는 퍼레이드
윌리어의 창립자 달 몰린은 당시 지노 바탈리, 파우스토 코피와 경쟁하던 지로 디 이탈리아 3회 우승의 베테랑 선수 지오르다노 코투르를 후원하기로 결정한다. 윌리어는 아드리아 해 연안의 도시 트리에스테에서 지오르다노 코투르를 리더로 한 프로사이클링 팀을 출범시키는데, 이 팀이 바로 ‘윌리어 트리에스티나(Wilier Triestina)’이다.
윌리어 트리에스티나라는 이름은 당연히 팀이 출범한 도시의 이름인 트리에스테에서 가져온 것이다. 당시 트리에스테는 이탈리아와 공산주의 국가인 슬로베니아가 반씩 차지하고 있었고, 시민들은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으로 대립하고 있었다. 시민들끼리 서로를 미워하고 대립하는 분위기 속에 긴장감은 점점 높아졌고, 유혈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윌리어 트리에스티나 팀은 스포츠를 통해 시민들을 하나로 묶었다. 윌리어는 그야말로 이탈리아인의 애국심을 상징하는 아이콘이었다. 1945년 윌리어는 회사명 또한 윌리어 트리에스티나로 바꾸게 된다.
윌리어 트리에스티나 팀은 1947년 촉망받던 젊은 사이클리스트 피오렌조 마니(Fiorenzo Magni)를 영입한다. 마니는 이듬해인 1948년 지로 디 이탈리아에서 코피, 바탈리 등과 치열한 경쟁 끝에 결국 우승의 유니폼인 마리아 로자를 입으며 윌리어 트리에스티나의 이름을 널리 알린다. 마니는 1950년까지 윌리어 트리에스티나 팀에서 활약했으며, 지로 이외에도 투어 오브 플랜더스에서 2회의 우승을 차지했다.
1948년 지로 디 이탈리아에서 코피, 바탈리와 치열한 경쟁 끝에 마리아 로자를 입으며 윌리어 트리에스티나의 이름을 널리 알린 피오렌조 마니
당시 윌리어 트리에스티나는 프레임 전체를 구리로 도금하는 독특한 오렌지 빛 프레임을 생산했다. 이 태양처럼 붉게 빛나는 프레임은 ‘라마타(ramata)'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곧 윌리어 트리에스티나의 상징으로 자리 잡게 된다.
그러나 영광의 날은 길지 않았다. 1950년대 이후 이탈리아는 빠르게 ‘스쿠터’와 ‘코터사이클’로 상징되는 공업화의 길을 걷는다. ‘기적의 경제 부흥’이 찾아왔지만 반면 사이클링의 인기는 점점 식어갔고, 결국 윌리어 트리에스티나는 1952년을 마지막으로 팀을 해산하게 된다.
프로 레이스로의 복귀
하지만 1980년대, ‘사이클링의 황금시대’를 맞이하며 윌리어 트리에스티나는 다시 레이스로 복귀한다. 메캅-훈베드, 셀레 산 마르코, 마레노, 슈퍼메르카티 브리안졸리 팀 등이 윌리어를 탔다. 1985년과 1986년에는 클라우디오 코르티가 윌리어의 부활을 알리는 구리빛 ‘라마타’ 프레임의 로드바이크를 타고 이탈리아 내셔널 챔피언십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2012년 선보인 타임트라이얼 바이크 트윈포일. 이름 그대로 에어로 형상의 양쪽 포크 레그가 위로 연결되어 전용 스템과 일체화되어 공기저항 감소를 효과를 낸다
1990년대 초반 윌리어 트리에스티나는 잠시 레이스를 떠났지만 1995년 브레스치알랏 팀을 통해 복귀하여 지로 디 토스카나 우승, 지로 디 이탈리아 15스테이지 우승을 차지하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1997년은 특히 기념비적인 해였다. 선수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의 부상과 장애를 극복하고 돌아온 마르코 판타니를 중심으로 한 신생팀 메르카토네-우노는 윌리어 트리에스티나를 타고 레이스에 데뷔했다.
마르코 판타니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슈퍼 클라이머로 잘 알려졌지만, 자전거에 대해서도 까다롭기로도 유명했다. 판타니는 끊임없이 더 딱딱하면서도 가벼운 자전거를 만들어 줄 것을 요구했고, 이를 개발하는 것은 윌리어 트리에스티나의 몫이었다. 마르코 판타니는 1997년 뚜르 드 프랑스에서 종합 순위 3위에 올랐다. 사고 후유증으로 한쪽 다리가 3㎝나 짧아진 장애를 극복하고 거둔 성과였다. 하지만 단순한 3위가 아니었다. 이는 가장 험준한 알프스 스테이지에서 우승을 거둔, 톱 클라이머의 복귀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997년 뚜르 드 프랑스 알프스 스테이지에서 우승과 함께 부활한 마르코 판티니와 까다롭기로 소문난 그의 자전거들
뚜르 드 프랑스의 산악 스테이지에서 가장 험준한 스테이지가 바로 랄프 듀에즈라는 점은 이견의 여지가 없다. 평균 경사도 7.9%, 고도차 1860m, 힐클라임 구간 22㎞의 악몽 같은 산악 코스다. 그리고 이 랄프 듀에즈 힐클라임의 최고기록은 1997년 마르코 판타니가 세운 37분 35초로, 아직도 이 기록을 깰 선수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마르코 판타니=비앙키라고 기억한다. 마르코 판타니가 뚜르와 지로 동시제패를 이룬 1998년 비앙키를 탔던 것은 맞다. 그러나 클라이머로서 전설적인 기록을 세운 1997년, 랄프 듀에즈에서 마르코 판타니가 탔던 자전거는 다름 아닌 윌리어 트리에스티나였다. 윌리어 트리에스티나는 당시의 기술로서는 한계에 가까운 경량화를 이룬 최신형 레이싱바이크인 ‘랄프 듀에즈’와 ‘모티롤로’였고 이는 마르코 판타니의 산악 스테이지 우승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윌리어 본사와 공장 내부에 전시된 윌리어의 영웅들
2002년 윌리어 트리에스티나는 다시 메르카토네-우노 팀과 함께한다. 비록 이때의 마르코 판타니는 예전과 같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지만, 그를 위한 첨단 레이스바이크 개발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윌리어 트리에스티나는 세계 최초로 비대칭형 프레임을 레이스에 투입한 자전거 메이커이기도 하며, 이러한 최신 레이스바이크 개발에 대한 의지와 노력은 람프레와 게롤슈타이너, 코피디스를 비롯한 여러 팀, 발란과 쿠네고, 페타키를 비롯한 유명선수들을 통해 값진 승리로 보답 받았다.
세계챔피언 발란의 저지와 그의 자전거
이탈리아의 많은 자전거 메이커가 점차 신기술 개발 경쟁력의 부족으로 과거의 명성을 잃어가는 가운데, 윌리어 트리에스티나는 계속 성장을 이어나가고 있는 몇 안 되는 전통 있는 자전거 메이커 중 하나다. 윌리어 트리에스티나는 현재 이탈리아에서 피나렐로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이 판매되며, 3위인 콜나고와는 큰 격차를 벌리고 있다. 윌리어 트리에스티나는 지금도 BB360EVO와 같은 새로운 규격을 선보이며, 레이스를 통해 검증된 프레임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107년이라는 오랜 전통은 끊임없는 혁신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올 수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다.
윌리어 제품, 어디서 만나볼 수 있을까?
윌리어는 국내에서 메리다와 산타크루즈, 아이비스의 국내 유통을 담당하는 오디바이크에서 만나볼 수 있다. 센토 1SR, 센토 1 에어, GTR, 트리에스티나 등 다양한 로드바이크가 출시되어 있으며 철저한 A/S도 받을 수 있어 점차 인기를 높여가고 있다.
제품문의 : ㈜오디바이크 02-2045-7100 www.odbike.co.kr
글 장낙규 객원기자
제공 자전거생활
출처 바이크조선
발행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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