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6.10 이탈리아 주요 언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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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6-06-12 23:08조회80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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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6전선공장안에서, 독재의 표면 저 너머
(Nella Fabbrica 326, oltre lo 'specchio della dittatura/이탈리아 Sett(Corriere della Sera 금요주간지), 6.10, 52면~55면, Guido Santevecchi 르포기사)
노동자와 대화금지, 수도평양 관광에서는 몇 몇 신형 전동차만 탑승시키다. 감시에서 벗어나 바라보면, 벽 틈은 벌어져있고 진면목이 드러나다.
<기사요약>
평양의 첫인상은 도로가 넓고 낡았지만 베란다가 있는 서민아파트, 폭넓은 보도와 자건거길, 나무가 우거진 강변, 교통체증이 적고 질서잡힌 모습이었다. 이미 사망했지만 항상 주민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창건자 김일성과 그의 아들 김정일의 기념비나 개선문 등이 여기저기에 세워져 있다. 몇 시간동안 인구 3백만여명의 조선인민공화국 수도를 돌아보면 세상으로 부터 멀어진 듯 하고 어이없게도 폐쇄공포증과 같은 증상을 느끼게 한다. 소음도 없고, 아무도 베란다에서 내려다보지 않으며 길거리에는 북한주민들이 지나다니지만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걸지는 않는 것 같다.
외국기자의 불안감은 동행자겸 감시자의 존재로 인해 더욱 가중된다. 그들의 주요임무는 ‘모범공장’, ‘모범농지’, ‘모범학교’, ‘모범구역’ 쪽으로 유도하는 것이다. 평양시 명소 중 하나인, 지하철 부흥역은 방공대피소로 활용하기 위해 지하 100m 깊이로 파서 지하철을 만들었다. 너무 깊다 보니 에스컬레이터로 내려가는 시간이 2분15분이나 소요된다. 그러나 북한주민들이 누구와도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에 그 시간이 더 길게 느껴지고 이러한 침묵은 공포정권에 대해서 많은 것을 시사해주는 것 같다. 지하철역 방공호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형식이다. 넓고 높은 아치형 천장에 위에 횃불이 달린 기둥 그리고 다양한 색채의 상들리에로 장식되어 있다. 지하철 노선을 따라 여기저기 구경하고 싶었지만 이는 금지되어 있다. 안내자의 지시에 따라 몇 분을 기다리는 동안 매우 낡은 전동차들이 지나쳐갔다. 어느 순간 안내자가 ‘올라가 타라’는 말을 듣고 쳐다보니 하얀색에 빨강색 선이 그려진 4칸짜리 신형 전동차였다. 우리가 탄 전동차는 지난해 노동당 창당 70주년기념을 맞이하여 북한에서 생산된 유일한 전동차였다. 안내자는 ‘올해는 36년만에 개최된 제7차 노동당 전당대회를 기념하기 위해 전동차 40대를 생산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스타하노프운동. 평양은 북한정권의 창이다. 관리자들은 326 전선공장을 매우 자랑스러워한다. 북한내 326개 전선이 있는 것이 아니라 김일성(영원한 주석)의 3월26일(1968년) 방문날짜를 의미한다. 방문당시 노동자들이 아직도 근무하고 있다. 약 1300여명의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으며 40세 이상의 군인출신과 몇 마디 나눌 수 있었다. ‘이렇게 큰 장치와 일하는 것이 힘들지 않은가?’라고 묻자 ‘아니다. 기계는 겨우 10년 밖에 지나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근무시간은 어떻게 되는가’라고 묻자 ‘하루 8시간 주6일 근무’라고 한다. 휴가는 6개월마다 15일이며 휴가 때에는 스포츠와 바다를 간다고 한다. 그의 미소 띤 표정은 응답한 말에 대해 만족한다는 뜻할 것이지만(감시자이자 안내자가 통역했다) 한편으로는 놀림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북한은 노동당 창당대회를 앞두고 '70일 전투'와 같은 노동자들의 노력경쟁 운동을 전개했다. 45세 한 노동자는 ‘70일 동안 6개월간 목표치를 달성했다’고 말했다. 어떻게 했는지를 물으니 ‘동일한 시간이지만 단지 강도를 더 높였을 뿐’이라고 말했다.
326전선공장에는 퇴근 후 이용하는 서양의 헬스클럽과 같은 좋은 시설이 있었다. 3층짜리 현대식 건물로서 매우 넓은 공간과 광택 나는 바닥에 커피숍, 레스토랑, 탁구장, 수영장, 사우나 이발소, 당구장 그리고 음악실과 체육관 등이 갖추어져 있었다. 우리는 고위급인사가 아닌 정말로 숙련공들이 이용할 수 있는지를 질문했고 수영장 이용자들에게 직접 여쭤보려고 하자 우리를 거칠게 밖으로 내쫒았다. 좌석이 있는 도서관을 가보았다. 파랑색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은 진짜 노동자로서 그들의 노동력 향상을 위함일 것이다. 화학제와 전기를 다룬 거친 손의 한 수척한 노동자는 ‘존경하는 김정은 대장과 영원한 주석 김일성이 원하는 바와 같이, 생산증가에 공헌하기 위해 공부한다’고 말하고 김일성 업적관련 서적을 읽으면서 ‘정치와 경제면에서 사회주의의 유익을 설명하고 있는데 내가 매우 좋아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소설책을 읽고 있는 한 노동자에게 다가갔다. 북한작가의 ‘매력적인 세상’라는 제목이었다. 줄거리를 여쭙자 ‘2011년 김정일의 사망에 따른 주민들의 고통과 이어서 김정은 시대의 새로운 돌입에 따른 큰 기쁨을 다룬 내용이다’고 말했다 사랑이야기는 없냐고 묻자 이상한 듯 의심스런 눈으로 바라보면서 ‘없다’고 대답했다.
추억과 감정.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김정은이 가장 공적을 인정만한 과학자와 교수에게 선사하는 거주지가 밀집된 미래과학거리이다. 대동강 강변을 따라 고층유리빌딩에 잘 정돈된 녹지대가 형성되어 있다.
오이모양의 25층 아파트 내부는 매우 놀랄 만하다. 침실 3개, 화장실 3개, 공부방, 응접실, 베란다, 부엌 등이 갖추어져 있으며 단 3명이 살고 있다. 안주인 음옥희씨는 ‘너희들이 어떻게 사는지 나는 잘 모르지만, 나는 불평할 것이 하나도 없다. 국가는 모든 것을 생각해준다. 우리에게 이 집과 음식, 교육 그리고 아마도 당신들에게는 낮은 액수겠지만 월급을 준다. 우리는 걱정할 것도 다른 세상을 부러워할 것도 없다’고 말했다.
부엌에서 나와서 꽁초와 맥주를 든 북한 관리(우리를 안내하고/감시한 사람)와 냉전시대를 다룬 영화에 나올듯한 인상의 러시아 기자와 함께 하얀 탁자에 앉았다. 손님 앞에서도 오만한 권력행사자의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북한정권의 장점을 설명하고 싶어 했다. 2층으로 내려와서 몇 분간 안내자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한 집의 문이 열려있었고 검게 염색한 한 할머니가 미소를 띠고 있었다. 1937년생으로 우리를 집안으로 초대했다. 가장 믿을 만한 노동자를 통해 정권의 관대함을 전 세계에 보여주기 위해서인지 이 집도 역시나 넓은 집이었다. 그의 남편은 테크놀로지 교수이자 1950~53 한국전쟁 참전자로서, 벽에는 그의 군복사진이 걸려 있었다. 집안을 구경한 후 그녀에게 전쟁에 대한 기억을 여쭈었다. 그녀의 표정은 더욱 창백해졌다. 전쟁의 기억이 그녀의 호흡을 멈추게라도 한 듯이 먼저 자리에 앉았다. ‘일본식민지에서 독립하던 1945년 당시 8세였고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었다. 일본군들이 남기고 간 것을 뒤적거리기 위해 평양역을 나갔다. 역겨웠지만 어머니는 나에게 그것을 먹으라고 강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다. 이후 1950년에는 12세였다’ 이야기를 멈추고 잠시 숨을 돌렸다. 이것은 준비된 것이 아니어서 오스카상 여배우와 같은 연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녀는 계속해서 ‘집을 파괴되고 사람을 죽이던 전쟁의 포화 속을 견딘 이야기를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동생도 전쟁에서 죽었고 친척들도 실종됐다....’고 말했다. 이는 선전용으로 준비된 상황은 아니었다. 미래과학거리에 거주하고 있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만약 이들이 몽유병에서 깨어난다면 북한주민들의 미래가 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불현듯 스쳐갔다.
(Nella Fabbrica 326, oltre lo 'specchio della dittatura/이탈리아 Sett(Corriere della Sera 금요주간지), 6.10, 52면~55면, Guido Santevecchi 르포기사)
노동자와 대화금지, 수도평양 관광에서는 몇 몇 신형 전동차만 탑승시키다. 감시에서 벗어나 바라보면, 벽 틈은 벌어져있고 진면목이 드러나다.
<기사요약>
평양의 첫인상은 도로가 넓고 낡았지만 베란다가 있는 서민아파트, 폭넓은 보도와 자건거길, 나무가 우거진 강변, 교통체증이 적고 질서잡힌 모습이었다. 이미 사망했지만 항상 주민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창건자 김일성과 그의 아들 김정일의 기념비나 개선문 등이 여기저기에 세워져 있다. 몇 시간동안 인구 3백만여명의 조선인민공화국 수도를 돌아보면 세상으로 부터 멀어진 듯 하고 어이없게도 폐쇄공포증과 같은 증상을 느끼게 한다. 소음도 없고, 아무도 베란다에서 내려다보지 않으며 길거리에는 북한주민들이 지나다니지만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걸지는 않는 것 같다.
외국기자의 불안감은 동행자겸 감시자의 존재로 인해 더욱 가중된다. 그들의 주요임무는 ‘모범공장’, ‘모범농지’, ‘모범학교’, ‘모범구역’ 쪽으로 유도하는 것이다. 평양시 명소 중 하나인, 지하철 부흥역은 방공대피소로 활용하기 위해 지하 100m 깊이로 파서 지하철을 만들었다. 너무 깊다 보니 에스컬레이터로 내려가는 시간이 2분15분이나 소요된다. 그러나 북한주민들이 누구와도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에 그 시간이 더 길게 느껴지고 이러한 침묵은 공포정권에 대해서 많은 것을 시사해주는 것 같다. 지하철역 방공호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형식이다. 넓고 높은 아치형 천장에 위에 횃불이 달린 기둥 그리고 다양한 색채의 상들리에로 장식되어 있다. 지하철 노선을 따라 여기저기 구경하고 싶었지만 이는 금지되어 있다. 안내자의 지시에 따라 몇 분을 기다리는 동안 매우 낡은 전동차들이 지나쳐갔다. 어느 순간 안내자가 ‘올라가 타라’는 말을 듣고 쳐다보니 하얀색에 빨강색 선이 그려진 4칸짜리 신형 전동차였다. 우리가 탄 전동차는 지난해 노동당 창당 70주년기념을 맞이하여 북한에서 생산된 유일한 전동차였다. 안내자는 ‘올해는 36년만에 개최된 제7차 노동당 전당대회를 기념하기 위해 전동차 40대를 생산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스타하노프운동. 평양은 북한정권의 창이다. 관리자들은 326 전선공장을 매우 자랑스러워한다. 북한내 326개 전선이 있는 것이 아니라 김일성(영원한 주석)의 3월26일(1968년) 방문날짜를 의미한다. 방문당시 노동자들이 아직도 근무하고 있다. 약 1300여명의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으며 40세 이상의 군인출신과 몇 마디 나눌 수 있었다. ‘이렇게 큰 장치와 일하는 것이 힘들지 않은가?’라고 묻자 ‘아니다. 기계는 겨우 10년 밖에 지나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근무시간은 어떻게 되는가’라고 묻자 ‘하루 8시간 주6일 근무’라고 한다. 휴가는 6개월마다 15일이며 휴가 때에는 스포츠와 바다를 간다고 한다. 그의 미소 띤 표정은 응답한 말에 대해 만족한다는 뜻할 것이지만(감시자이자 안내자가 통역했다) 한편으로는 놀림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북한은 노동당 창당대회를 앞두고 '70일 전투'와 같은 노동자들의 노력경쟁 운동을 전개했다. 45세 한 노동자는 ‘70일 동안 6개월간 목표치를 달성했다’고 말했다. 어떻게 했는지를 물으니 ‘동일한 시간이지만 단지 강도를 더 높였을 뿐’이라고 말했다.
326전선공장에는 퇴근 후 이용하는 서양의 헬스클럽과 같은 좋은 시설이 있었다. 3층짜리 현대식 건물로서 매우 넓은 공간과 광택 나는 바닥에 커피숍, 레스토랑, 탁구장, 수영장, 사우나 이발소, 당구장 그리고 음악실과 체육관 등이 갖추어져 있었다. 우리는 고위급인사가 아닌 정말로 숙련공들이 이용할 수 있는지를 질문했고 수영장 이용자들에게 직접 여쭤보려고 하자 우리를 거칠게 밖으로 내쫒았다. 좌석이 있는 도서관을 가보았다. 파랑색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은 진짜 노동자로서 그들의 노동력 향상을 위함일 것이다. 화학제와 전기를 다룬 거친 손의 한 수척한 노동자는 ‘존경하는 김정은 대장과 영원한 주석 김일성이 원하는 바와 같이, 생산증가에 공헌하기 위해 공부한다’고 말하고 김일성 업적관련 서적을 읽으면서 ‘정치와 경제면에서 사회주의의 유익을 설명하고 있는데 내가 매우 좋아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소설책을 읽고 있는 한 노동자에게 다가갔다. 북한작가의 ‘매력적인 세상’라는 제목이었다. 줄거리를 여쭙자 ‘2011년 김정일의 사망에 따른 주민들의 고통과 이어서 김정은 시대의 새로운 돌입에 따른 큰 기쁨을 다룬 내용이다’고 말했다 사랑이야기는 없냐고 묻자 이상한 듯 의심스런 눈으로 바라보면서 ‘없다’고 대답했다.
추억과 감정.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김정은이 가장 공적을 인정만한 과학자와 교수에게 선사하는 거주지가 밀집된 미래과학거리이다. 대동강 강변을 따라 고층유리빌딩에 잘 정돈된 녹지대가 형성되어 있다.
오이모양의 25층 아파트 내부는 매우 놀랄 만하다. 침실 3개, 화장실 3개, 공부방, 응접실, 베란다, 부엌 등이 갖추어져 있으며 단 3명이 살고 있다. 안주인 음옥희씨는 ‘너희들이 어떻게 사는지 나는 잘 모르지만, 나는 불평할 것이 하나도 없다. 국가는 모든 것을 생각해준다. 우리에게 이 집과 음식, 교육 그리고 아마도 당신들에게는 낮은 액수겠지만 월급을 준다. 우리는 걱정할 것도 다른 세상을 부러워할 것도 없다’고 말했다.
부엌에서 나와서 꽁초와 맥주를 든 북한 관리(우리를 안내하고/감시한 사람)와 냉전시대를 다룬 영화에 나올듯한 인상의 러시아 기자와 함께 하얀 탁자에 앉았다. 손님 앞에서도 오만한 권력행사자의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북한정권의 장점을 설명하고 싶어 했다. 2층으로 내려와서 몇 분간 안내자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한 집의 문이 열려있었고 검게 염색한 한 할머니가 미소를 띠고 있었다. 1937년생으로 우리를 집안으로 초대했다. 가장 믿을 만한 노동자를 통해 정권의 관대함을 전 세계에 보여주기 위해서인지 이 집도 역시나 넓은 집이었다. 그의 남편은 테크놀로지 교수이자 1950~53 한국전쟁 참전자로서, 벽에는 그의 군복사진이 걸려 있었다. 집안을 구경한 후 그녀에게 전쟁에 대한 기억을 여쭈었다. 그녀의 표정은 더욱 창백해졌다. 전쟁의 기억이 그녀의 호흡을 멈추게라도 한 듯이 먼저 자리에 앉았다. ‘일본식민지에서 독립하던 1945년 당시 8세였고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었다. 일본군들이 남기고 간 것을 뒤적거리기 위해 평양역을 나갔다. 역겨웠지만 어머니는 나에게 그것을 먹으라고 강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다. 이후 1950년에는 12세였다’ 이야기를 멈추고 잠시 숨을 돌렸다. 이것은 준비된 것이 아니어서 오스카상 여배우와 같은 연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녀는 계속해서 ‘집을 파괴되고 사람을 죽이던 전쟁의 포화 속을 견딘 이야기를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동생도 전쟁에서 죽었고 친척들도 실종됐다....’고 말했다. 이는 선전용으로 준비된 상황은 아니었다. 미래과학거리에 거주하고 있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만약 이들이 몽유병에서 깨어난다면 북한주민들의 미래가 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불현듯 스쳐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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